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수·순천 10.19 사건 (문단 편집) === 배경과 원인 === 사건의 직접적 발단은 '''[[제주 4.3 사건]] 일부 진압 임무를 하달받은 14연대의 좌익 군인들이 "[[동족상잔]]"이라며 지휘관을 사살하고 장병들을 선동한 것에서 시작'''되었다. 공산 세력의 침투 및 미군이 그 침투를 통제하지 못한 점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. >'''창군 과정에서 지켜본 미군의 특징은 '선서'를 무척 중시하는 것과 구타행위를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었다. 우리는 지금까지도 선서를 단순한 요식행위로 여기는 경향이지만 그들은 달랐다.''' >경비대에 입대하는 장병은 미군정 당국 및 곧 수립될 정부에 충성할 것을 빠짐없이 선서했다. >'''미군은 이 선서를 의심없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. 좌파이든 우익이든 전력을 불문하고 선서라는 의식을 거치면 일단 충성스런 군인으로 간주됐다. 이 때문에 경찰에 쫓기던 좌파 성향의 세력들이 상당수 군에 입대해 도피처로 삼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.''' >(중략) >여순반란 사건은 신생 대한민국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다. '''선서 한 번으로 군에 들어와 터를 잡은 좌파 세력이 정부수립 2개월 만에 폭동을 일으켜 그 실체를 드러낸 사건이었다'''. >---- >[[백선엽]], 2009, 군과 나, 시대정신,400-402 >한편, 한국군의 반란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. '''미군철수와 한국정부 수립이 구체화되자, 주한미군은 1948년 초부터 한국군의 병력을 급격하게 증강시켰다. 그리하여 병력자원에 대한 면밀한 검열히 불가능해, 좌파 세력이 대거 군대에 유입되었던 것이다.''' >(중략) >반란은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적 침투와 공작 · 선동에 기초한 것이지만, '''급격한 병력의 확충이 초래한 허점에서 자연스레 비롯한 면도 있다'''. >---- >정병준, 2006, 한국전쟁, 돌베개, 233쪽 >국방경비대 창설 당시 미군정청 군사국의 한국인 고문 [[이응준]]이 국방경비대원 모집대상자들에 대해 신원조사를 실시하라고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'''군내에 파벌이 형성될까봐 우려한 군정당국은 그에 대해 향후 정보기구를 활용하겠다면서 반대했다. 그 결과 국방경비대의 각 연대별로 진행된 모병과정에서 좌파계열 군사단체에서 활동하던 자들이 대거 입대하게 됐다. 게다가 미군정청은 ‘불편부당, 정치적 중립’이라는 입장을 내세워 국방경비대원들의 정치참여를 제한하는 수준에서 단지 그들에게 국내 치안확보에 전력하라고만 당부했을 뿐이다.''' > >그러나 당초 미군정의 생각과 달리 국방경비대에 발을 들여 놓은 좌파의 세포들은 여러가지 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. 이에 일찍부터 조선로동당의 국방경비대 침투를 감시해왔던 미 군정청 방첩대는 1947년 9월 미·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국방경비대 내의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숙군을 계획했다. 미군정청 방첩대는 사전에 각 지역지부에 담당국방경비대와 남로당과의 관계를 감시할 뿐만 아니라 국방경비대 내의 좌파성향의 세포수를 파악하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다. >---- >서상문, 2005, (알아봅시다!) 6·25전쟁사 . 제1권 , 배경과 원인, 서울: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, 2005, 117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